'금융사관' 대전고 부총리 등 막강 인재 배출('머니투데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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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2 이은명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4,261회 작성일 2004-09-23 10:51본문
'금융사관' 대전고 부총리 등 막강 인재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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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기사 보기 2('머니투데이' - 2004년9월07일자) (클릭!)
금융계의 최대 인맥은 충청, 특히 대전고 인맥이다. TK(대구 경북) PK(부산 경남) MK(목포 광주)가 관계나 정계, 경제계에서 우리 근대사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금융계만은 예외였고 그 공백을 충청-대전고 인맥이 메웠다. 이들은 다른 인맥과 달리 파벌을 형성하거나 공생하는 그런 관계를 구축하지는 않은 점이 특이하다. 대전고는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최고 당국자인 재경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배출했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한국은행 총재도 배출했다. 은행장 출신은 열 손가락도 모자랄 지경이다. 강경상고가 금융회사의 창구와 현장에서 실무를 처리하는 현장 금융인들의 보병학교였다면 대전고는 금융 엘리트들의 인재 사관학교였던 셈이다. 강경(江景)이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물과 함께 성장한 곳이라면 대전(大田)은 도로와 철도로 상징되는 도시다. 두 도시 모두 현대적 의미로는 물류와 관계가 깊다. 상품이 옮겨지는 것이 전통적 물류라면 돈의 물류는 금융이다.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려면 돈과 상품의 흐름이 왕성해야 하고 인재가 필요하다. 20세기 초 강경이 근대 은행이 너도나도 둥지를 튼 금융의 고즈넉한 고향이었다면 대전은 현대적 금융기관과 철도라는 유무형의 물류 대동맥이 자리를 잡은 후 생긴 곳이다.
◇강경, 대전.. 전통과의 결별, 또다른 시작
물길보다 도로와 철도가 중요해지면서 강경도 군내에서 논산읍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행정구역도 논산으로 정리되면서 갱갱이(강경사람의 별칭)도 논산 사람으로 불려지게 됐다. 그리고 40 ~ 50년대를 전후해 쇠퇴해 가는 강경을 뒤로 하고 대전으로 하나둘씩 떠났다. 중학교를 강경(강경중)에서 마친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을 필두로 그들은 대전고로 진학해 국내 금융인맥의 큰산을 형성하게 된다. 해방후 금융업과 경제부처의 끈끈한 관계가 생각하면 금융인의 역사는 금융관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 김용환 장관(공주고), 80 ~ 90년대 나웅배 부총리, 이규성 장관, 2000년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상 대전고)은 금융사(史)와 맥을 같이 해 왔다. 대전은 1904년 6월에 대전역이 세워지고 같은해 11월 10일 경부철도가 준공되면서 한가한 농촌의 모습에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신흥도시로 바뀌었다. 인구의 부침도 심했다. 1910년대 강경의 상주인구가 3만여명(상인과 뱃사람 등 유동인구를 합하면 10만명)이 넘었지만 대전의 경우 1931년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할 당시 인구가 2만 3284명이었다. 하지만 89년(대전직할시 출범)을 기준으로 하면 대전과 강경의 인구는 105만 1795명과 2만990명으로 바뀌었다. 조선말부터 뚫린 물길의 힘을 바탕으로 1920년 강경상고가 건립된 것처럼 대전에도 철도가 놓이면서 인재가 모여들었다. 대전고는 1917년 경성중학교의 대전분실로 설치돼 이듬해 관립 대전중학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재의 산실로 금융이라는 자본주의의 혈액 역할을 맡게 된다. 60년대 초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위해 삽을 들었던 시기라면 50년대는 전후 재건과 미국의 차관을 이용해 산업의 씨앗이 뿌려진 때다. 이념과 정치 과잉 시대에서 경제로 눈길을 돌리던 50년대 중반을 전후로 대전고 졸업생들은 대거 경제학과, 경영학과 등 상대로 진학하게 된다.
◇정치과잉 시대서 먹고사는 문제로
구 한일은행에서 상무와 감사, 충청은행에서 은행장(98년)까지 지낸 최동열 배재대 교수(논산 출신)는 "56년도 대전고 졸업생 350여명 중 상대에 입학한 이들이 33명으로 10명 수준에 머물렀던 그 전과 비교하면 상대 선호도는 3배 이상 올라갔다"고 말했다. 당시 최 전 행장의 동기중에서는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 배찬병 전 상업은행장 등 은행장이 세명이나 배출됐다. 이들은 90년대에 나란히 은행장으로 뛰면서 대전고 출신 금융인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전 총재는 90년에 산업은행 총재로 일했고 배 전 행장과 최 전 행장은 98년에 나란히 은행원들의 꿈인 은행장에 올라섰다. 대전고 출신들이 금융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연고보다 실력으로 내공을 다져놓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연과 학연을 따지는 당시 풍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이들은 어쩔수 없이 은행같이 시험을 치러서 갈 수 있는 직장을 선호했다는 것. 전경련에서 출발해 한국창업투자의 산파역을 맡았고 현재는 선물거래소 감사로 재직 중인 김건중씨(논산 출신)는 "동기들이 대부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과 원칙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을 꺼렸다"며 "빈틈없이 꼼꼼해야 인정받는 금융업에는 이런 기질이 필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 출신 이규성 형제..충청의 명가
강경중학을 졸업하고 55년도에 대전고에 입학한 이규성 전 장관(왼쪽 사진)과 그 형제들은 충청 제일의 명가(名家)를 당대에 일궈낸 것으로 유명하다. 88년과 98년 10년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장관을 지내 관운을 타고났다는 평을 받는 이 전 장관은 부하직원들에 대한 애정과 온화한 성품, 꼼꼼한 일처리로 재무부 출신 후배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장관으로 꼽힌다. 이 전 장관의 비서관을 지낸 윤용로 금융감독위원회 국장은 "외환 위기 당시에 한국에 제2의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며 쓴 소리를 내뱉았던 스티브 마빈도 위기 극복과 예방에는 이 장관의 몫이 컸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며 "JP가 총리인준을 못 받았을 때 총리 대행으로 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98년 당시 총무과장이었던 문창모 재경부 국장은 당시 재경부 직원들이 거듭된 밤샘 근무 때문에 가정생활조차 어렵다고 호소하자 이 전 장관이 직원 가족들을 과천 청사로 초청해 '아버지와 남편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느냐'고 다독인 일화를 소개했다. 80년대 말 한국은행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는 대전고 동문인 김건 당시 한은 총재와 수차례 독대해 진솔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전 장관의 동생 중에는 이규홍 대법관이 있다. 90년대말 이 전 장관이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이라는 메스로 기업들을 해부하면 당시 서울지법 민사50부 부장판사를 맡고 있던 이 대법관은 수술대에 선 기업들을 진찰하고 되살려줘 당시 경제의 양.음지를 지휘하는 양대 수장으로까지 꼽혔다. 이밖에 이규승 충남대 농대 교수와 이규방 국토연구원장, 이규왕 명지대 화학과 교수도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대전고에서 만개한 논산.강경의 인재들
70년 초 대통령 비서실에서 현대건설로 옮겨가면서 샐러리맨의 신화와 현대맨의 상징처럼 남은 이내흔 현대통신 회장(왼쪽 사진)은 논산-대전고 인맥의 큰형님 역할을 맡고 있다. ' 아무도 손댈엄두를 못 냈던 경부고속도로·양강댐 건설, 중동 진출을 성공시킨 현대건설이야말로 진정한 벤처 원조'라고 말하는 이 회장은 6년째 현대통신을 맡고 있고 현재는 홈네트워크 사업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보험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영회 전 교보자동차보험 사장과 이종업 전 LG화재 전무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은에서 출발해 외환카드와 한길종금 대표이사를 지낸 염동희씨와 이강천 동우캐피탈 대표이사(전 동양그룹 기조실 감사), 김대중 전 SK투신운용 감사도 논산(강경)-대전고 금융인맥의 큰 형님으로 통한다. 이밖에 금융감독원에는 오갑수 부원장이 있고 한국공정거래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용 전 공정위 상임위원은 경제기획원 인맥을 대표한다. 학계에는 김시중 고려대 명예교수와 신극범 대전대 총장, 유장걸 제주대 교수, 이극래 충남인터넷고 교장 등이 있다. 20세기에 강경인들은 금강(錦江)과 황해(黃海)의 물류를, 대전고 인맥들은 철도와 도로를 바탕으로 황금을 일궜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외국자본의 거센 파고가, 21세기에 들어서는 정보화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21세기 그들은 길에서 헤매지 않고 길목을 지킬 것이다. 금융업의 험난한 도정에서 그들을 끊임없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사진=박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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